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 전쟁 (문단 편집) === 전후 숙청 및 보트 피플 === 북베트남의 전쟁 수행을 지원했던 베트콩과 간첩, 좌파 인사들이 전쟁 이후에 대대적으로 숙청당했다는 글이 있고, 많은 커뮤니티에서도 돌아다니고 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오해와 편견]] 항목과 [[베트남 공화국]] 항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절반의 사실이다. 흔히 토사구팽을 당했다는 식으로 묘사되지만, 정확히는 전쟁 후 남파된 북베트남군과 자생적 반정부주의자(소위 민족주의자)의 세력싸움에서 민족주의자들이 밀려난 것. 여기서 북베트남의 강력한 재교육 정책에 항의했던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이 재교육 캠프에 수용되었다. 반항하지 않은 이들은 요직에서 밀려나는 선에서 그쳤다. 대신 강하게 반항한 인사들에게는 재교육 캠프행을 때렸다. 북베트남에서 내려온 이들은 토사구팽식으로 숙청되지 않았고, 몇몇 인사는 뒤에도 요직에 올랐다. 대표적으로 응우옌흐우토는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지도자를 역임했다가, 전쟁 후 통일 베트남에서 국가주석(1981~1982)까지 지냈고, 부주석도 지내다가(사실상 명예직) 1996년에 사망했다. 여러 목적으로 재판없이 즉결 처형된 사람은 약 6만 5천명 ~ 10만명 정도로 추산되며 베트콩 정권이 들어선 뒤 남베트남 정부 관련 인사, 고위 포로, 고위층을 학살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베트남이 적화 통일되기까지 대략 1년의 기간 동안 남베트남의 반공주의자들과 기업인, [[화교]]들과 [[태국인]]들, 남베트남 정권의 군인, 경찰, 기타 공무원들은 종전 후 많은 숫자가 망명을 하거나 [[보트피플]]이 되어 베트남을 탈출했다. 이후 통일된 베트남은 오랜기간 빈국을 벗어나지 못한다. 쉽게 말해 숙청도 하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이미 사라진 상황. 물론 재판없는 즉결 처형'만' 6만 5천에서 10만인데 2차 대전 당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일본 나가사키 원자폭탄 사망자수]]가 3만 9천에서 8만명 사이인 것을 비교해보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즉결 처형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보트 피플이 탈출하는 과정에서 질병이나 기근 혹은 해적 등으로 인해 많은 숫자가 사망해 간접적으로 숙청이 자행되었다. '''그리고 남베트남의 군인, 경찰, 공무원, 교사 등은 사상 개조라는 미명 아래에 재교육 캠프로 끌려갔다.''' 사실 베트남 전쟁 이후 숙청에 대한 논지는 정치적인 성향에 따라서 제각각인데 확실한 것은 남베트남 관련 인사[* 당시 남베트남 인구 1900만명 중 학살이나 보트피플 대상자 100여만명을 제외한 나머지에서 다시 미성년자 등을 제외한 성인의 숫자는 약 천만대 초반 정도다. 그 중 100만명이니 고위층이라고 할 수는 없다.]의 재교육 캠프는 '''분명히 있었고''' 이 중 10만 명은 가혹한 처사를 받았다. 거기에서의 대접은 전혀 좋은 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진을 보면 목에 나무 형틀을 쓴 십수명 전체의 양 발이 길다란 하나의 나무형틀에 고정된 채로 전혀 움직이지도 못 하는 고문을 당하며 수감되어 있을 정도다. 이런 재교육 캠프에서 갖은 학대를 받은 사람 중에 대한민국 공사 이대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중앙정보부 소속 무관이었고 예비역 장성이었기 때문에 외교 특권을 박탈당하고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귀환한다. 이 사람이 당했던 이야기를 본다면 공산 베트남에서 인권 탄압이 없었다거나 살 만했다는 말은 거짓이다. 여기에 수용된 사람은 약 100만 명 정도라고 한다. 대숙청 이후 공산 베트남을 탈출하려는 대규모 보트 피플이 발생했다. 그 수는 어림잡아 80만 명이나 되었다. 특히 보트 피플이 폭발적으로 늘어난것은 1978년 이후로 종전된 지 3년이 지난 뒤였다. 정치인, 관료 같은 상류층들은 미국이 철수한 1973년부터 남베트남이 패망하는 1975년까지 진작에 남베트남을 빠져나갔고 1978년까지 남아있던 사람들은 교사, 의사, 상인 같은 중산층 사람들이었다. 보트 피플의 또다른 경우는 1979년 2월~3월까지 진행된 중월 전쟁의 여파로 탄압을 받을 위기에 있었던 중국계 [[화교]]들도 적지 않았다. 대규모 보트 피플이 상당 기간 이어졌던것은 단순히 보복이 두려워서라기보다는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캄보디아와 중국과의 전쟁이 10여년 넘게 이어졌기 때문에 '''전후 복구에 쓸 돈을 전쟁으로 써야했던 판인지라''' 전후 복구가 지지부진하여 한 동안 경제 상황이 영 좋지 않았기 때문인 영향도 컸다. 일부에서는 당시 공장에 나가서 일을 해봐야 푼돈이나 받을 뿐이고 물가 상승 문제도 심각했던지라 공장에서 일을 해서 먹고 살아봐야 생활에 여러 가지 애로 사항이 있었기에 목숨을 걸고 배타고 '''외국으로 돈을 벌려고 나갔던''' 이들도 많았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바다에 오직 작은 목선에 의지해 누군가가 살려주기를 기대하며 일가족을 모두 태운 채로 바다를 떠돌던 사람들을 대부분의 나라에서 받아주기를 거절했기에 해적에게 당하거나 바다에서 굶어 죽어간 사람이 많았기에 현대 인류역사상 최악의 비극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구조한 베트남 난민의 증언에서도 나오는 얘기다. 한편으로 육로로 탈출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랜드 피플이라고 부르며 지금도 후손들이 국경지대인 톤레삽 호수 위의 더러운 물 위에서 살고 있으며 주로 관광객에게 구걸하며 연명하고 있다. 이들은 베트남에서도 인정하지 않는 존재라 국적도 없는 존재들이다. 의외로 공산 베트남에서는 이들의 탈출을 적극적으로 막을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는데 당장 전쟁 때문에 전후 복구가 지지부진해서 먹여살리기 빠듯했던데다가 크메르 루주와는 달라야한다는 인식도 있었기 때문이다. 남한에서는 초기에는 남베트남 패망의 교훈으로 이적 행위를 때려잡자거나 '''우익은 부패하지 말자'''라는 걸 모토로 했고 한국보다 우익이 개판인 남베트남은 망해도 싸지만 한국은 든든하다는 걸 강조했다. 북한의 반응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갈리는데, 전통적인 분석은 남베트남의 패망,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공산화에 고무된 김일성이 자기도 적화통일을 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해서 소련과 중국에게 지원을 요청하며 주접을 떨었다는 것이지만[* 적어도 당시 박정희는 김일성의 의도가 여기에 있다고 봤다.][* 사실은 불가능하다. 김일성은 베트남처럼 자력으로 통일하지 않고 동맹국들을 이용해 먹으면서 적화통일을 하려고 했으니 생고집피우는 북한을 바르샤바 조약기구에서 좋게 볼 리가 없었다.] 반대로 미국이 베트남 대신에 한국의 개입을 강화하고 더 많은 미군을 배치할까봐 우려하여 중국 및 소련과의 동맹 강화로 대응하려 했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소련은 김일성의 입국조차 거절해버렸으며 중국은 성의있게 나왔지만 1976년에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발생하면서 중국 측이 열받아서 관계가 다시 경색되었다. [[김일성]]이 이후 했던 연설인 "전쟁이 벌어지면 잃을 것은 철조망이요. 얻을 것은 조국 통일이다"라는 말은 남조선과 미제놈들을 '''선제 공격'''하자는 말이 아니라 미제가 전쟁을 일으키면 그에 '''맞서 싸울 것'''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사실 중소 분쟁도 어느 정도 정리되고 북한도 주체 사상으로 고립되어 있어 이전과 같은 원조가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노골적으로 도움을 거절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 때 발생한 학생 운동이나 [[5.18 민주화운동]] 등에 대한 흑색 선전으로서 남베트남의 막장화와 베트콩들에 대한 공포감을 부풀린 측면도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대용 공사의 수기를 드라마로 만든 '사이공 억류기'가 [[김무생]] 주연으로 출시되었다. 일명 한국판 [[킬링필드]].[* 이대용 공사는 당시 한국 정부를 미국의 [[괴뢰]] 정권으로 인식하고 있던 [[제2세계|공산권]]의 시각 때문에 더 가혹한 처우를 받았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미제의 스파이''' 취급을 받은것.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대용 공사는 '''당신 같은 고위직이 무사히 살아온걸 보면 변절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받으며 곤욕을 치른다. 심지어 [[이수근(북한)]]이 간첩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월간 조선에 했다가 욕을 무척 먹었다.] 1980년대 월남 수용소라는 애먼 제목으로 출간된 고백 수기가 있는데 이 책은 남베트남의 전직 학생 운동 지도자가 통일된 공산 베트남에서 고생하는 이야기다. 사실 절반 정도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사이공의 티우 정권에 대한 투쟁을 얼마나 잘했으며 절반 정도는 무식하고 말 안 통하는 북쪽 북베트남 동지들에 대한 비난, 나머지 절반은 북베트남을 비난한 죄목으로 체포되었을 때의 일이다.'''[* 여담으로 저자는 외국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공산 베트남 당국의 출국 허가를 받아 미국에서 살았다.] 현재 베트남 내에서도 베트남 전쟁에 대한 평가는 지역에 따라 미묘하게 다르다. 사람들의 착각과 달리 중, 소의 참전을 우려한 미국은 북베트남에 공격하지 않고 주로 남베트남의 방어만을 했기 때문에 남부의 경우 직접적인 전장이 되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에 따라서 평가가 엇갈리는데 반해서 북부에서는 혼란 상태에 빠진 남베트남을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평가다. 물론 현재는 남부 지역이 상대적으로 잘 살기 때문에 남부 지역이 북부 지역에 상대적으로 경제적으로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기는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